윤정희 납치미수 사건 - 톡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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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납치미수 사건
<마이클 리> 증언
영화배우 윤정희 별세비보를 듣고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비화!
1977년 7월 31일,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를 납치 하려고 공작을 하였을 때에, 필자는 미국정부 <000 정보국> 요원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조직이 북한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 활동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자그레브 주재 미국외교관 한사람의 도움으로 그 납치공작이 좌절되었지만, 만일 그들이 자그레브에 와 있는 <고려민항>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가게 되는 경우라면 그 일을 선제공작으로 저지할 준비를 우리조직이 이미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누구도 한 일이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미국정부가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우방 대한민국과 국민을 보호하기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필자는 동서냉전시대 40년간 미국정부의 관리로서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뒤흔든 많은 대형 사건들을 담당했으며 첩보전선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 당시 비엔나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의 해외공작을 총지휘하는 첨탑이었다. 그들의 해외공작무대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파리, 코펜하겐, 로마, 리스본,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부다페스트, 프라하, 모스크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런던, 카라치, 마카오, 홍콩, 싱가포르, 베이징, 그리고 미국 캐나다 일본의 주요도시를 거미집같은 조직망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망에서 여러 북한 공작원들이 활동하고 있을 때 그들과 어울려 협조한 한국의 재외동포들은 거의가 지성인들이었으며 조국을 배신한 좀비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백건우와 윤정희의 납치시도사건이었다.
홍콩에서 1978년에 영화배우 최은희를 납치할 때 <이상희>라는 여자가 저들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처럼 파리에서는 백건우와 윤정희를 납치하려고 <박인경>이라는 여자가 앞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때 이 공작을 위하여 비엔나에 있는 북한대사관에는 노동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정경희>가 나와 있었고 그녀가 총지휘 하였다.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 <이상준>과 그의 처 <방화자>가 모든 보조역할을 하였고 평양과의 통신, 공작원들과의 연락, 보급, 재정, 수행안내 등을 은밀히 처리하였으며 <자그레브> 현장에는 대남공작 베테랑인 <허묵>이 나가있었다. 이 사건의 배경과 어떻게 시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끝이 났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먼저 미스 코리아 출신 <윤정희>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본명은 <손미자>이고 1944년 7월 30일생이다. 1967년에 영화 <청춘극장>에 데뷔하였고 향후 7년 동안 무려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 절정에 올랐고 주연상 대종상을 포함하여 한국영화계에서 최다 수상자 배우였다.
1974년에 서강대학교 총장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소르본느> 대학교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알게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1976년에 화백 <이응노>(1904-1989)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건우 윤정희 부부는 화백 이응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초 박인경이 윤정희 부부에게 접근하여,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거부가 고령의 부모를 위해 음악회를 열고자 하는데 백건우를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청장의 수취인이 백건우가 아니라 박인경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건우는 연주회가 취리히에서 열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백건우가 바쁜 스케줄을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박인경의 말이 백건우를 추천한 자기가 난처하게 되었다고 하여, 하는 수없이 초청에 응하겠다고 하였다.
1977년 7월 29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그들의 생후 5개월 된 딸과 박인경이 파리에서 비행기로 취리히에 갔다. 공항에 내리니 <파블로비크>의 비서라고 하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초청자의 노부모가 현재 <자그레브>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고 <자그레브>로 가야한다고 하였다.
백건우는 비자 없이 자기들이 어떻게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로 갈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비서라는 여자는 초청자가 이미 입국수속을 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취리히>발 <자그레브>행 왕복비행기표를 건네주었다. 그때 윤정희는 생후 5개월 된 딸을 위하여 요구르트를 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박인경과 그 비서라는 여자가 자리를 옮겨 흰 봉투 하나를 박인경에게 주었다.
그 속에는 박인경만 알아야하는 공작지령이 들어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비서는 취리히에 남고 백건우와 윤정희와 그들의 딸과 박인경이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박인경은 누구인가 - <자그레브> 비행장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그런 지방도시 작은 비행장에 <고려민항>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고 저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유독 그 여자만 어울리지 않게 썬 그라스를 썼고 흰 저고리에 검정색 동강치마를 입고 있어서 전형적인 북한여성의 옷차림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목격한 윤정희는 대단히 불안하였고 긴장하였다고 한다. 윤정희의 예감이 맞았다. 그녀는 북한공작원 <허묵>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에 참여한,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의 3등서기관 <이상준>의 처이며 이름은 <방화자>이었다.
그때 백건우가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박인경이 취리히에서 그 여자비서로부터 받은 흰 봉투를 주었다. 봉투 속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그 집을 찾아가는 약도, 그리고 돈 800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거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를 초청해놓고 마중도 안 나오고 택시를 타고 오라니 그런 결례가 어디 있나. 백건우는 이상한 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택시를 타고 찾아간 집은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제법 큰 3층집이었다. 연주회를 한다면 방문객들도 많이 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어야 하겠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수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아내와 딸을 택시 안에 남겨두고, 박인경과 함께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박인경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2층에 만찬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따라 들어가 보니 1층은 방문이 모두 잠겨있고 창문도 커튼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2층에는 갑부가 마련하는 만찬이라고 믿기 어렵게 과일접시 하나와 빈 접시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3층에서 자기를 초청한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남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건우는 그가 북한공작원임을 직감하고 쏜살같이 택시로 달려갔다. 그 동양인은 “wait, wait" 를 연발하며 따라오고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거의 택시의 문 손잡이를 잡을 정도로 접근하였다.
백건우는 그 택시를 타고 급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그레브>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바로 북한공작원 <허묵>이었다.
그때가 1977년 7월 31일 오후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미국영사관의 문은 닫혀있었고, 도서관이 아직 열려있어 백건우 가족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마침 잔무정리를 위해 남아있었던 미국외교관 한사람이 백건우 가족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안내한 후 자정 무렵에 4층 416호실로 옮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누가 41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백건우는 당황하여 그 미국외교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그가 묵고 있던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왔을 때 거기에는 동양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416호실 앞에 서있는 것을 목격 하였다. 그중 한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던 북한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허묵>이었다. 그는 즉시 백건우에게 전화하여, 지금 북한사람들이 문밖에 와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 미국외교관은 <크리스텐슨>이었고 그로부터 보고를 받은 우리 정보국 조직은 백건우 윤정희를 철저히 보호하고 파리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북한사람들이 사라진 후에 그는 백건우 일행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안내하고 파리 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저들이 탑승하고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암호에 차질
- 이 납치공작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방화자>의 옷차림이 백건우 일행에게 불길한 신호를 보낸 것이며, 다음은 박인경이 <자그레브> 현장에서 그 집안에 들어갔을 때 사용해야할 암호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박인경이 “왔어요” 하면 잠복하고 있던 북한공작원들이 뛰어나와 백건우와 윤정희를 덮치도록 사전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박인경이 엉뚱하게 “다들 어디 갔나” 라고 하는 바람에 잠복공작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암호가 이상하자 <허묵>이 혼자 나타났고 백건우가 도주하였다. 그 다음날 그들이 호텔 앞에서 다시 한 번 납치를 시도했으나 미국외교관의 기지로 백건우 일행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납치미수사건 후 26년이 지난 2003년에는 북한이 이 납치공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그레브>가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이 문서는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행정위원인 <도부리보예 비디치>가 북한대사 <정광순>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정광순> 대사가 해명한 내용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납치시도 사건은 현지주재 북한외교관들과는 아무상관이 없으며 평양에서 직파한 공작 팀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박인경의 이후 행적 -
이 사건이 발생하고 17년 후인 1994년 1월부터 박인경 (1926년생)은 아무런 제재 없이 한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박인경은 2000년부터 2005년 9월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이응노 미술관>을 운영하였고, 대전광역시는 2007년에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고 박인경을 명예관장으로 추대하였다.
일부 언론에서 박인경의 이적행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한국정부는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정부는 참으로 허술하기가 그지없다. 화백 이응노와 그의 처 박인경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적행위를 범했다. 1958년에 프랑스 파리로 간 그들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때 파리주재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들의 가택을 수색했는데 특수단파수신 라디오와 북한간첩 난수표와 자살용 청산가리가 발견 되었으며 세포조직명단에는 이응노와 윤이상이 중요멤버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이들에게 대전에는 이응노 미술관을 지어주고 통영에는 윤이상 기념관을 지어주었다.
박인경은 이응노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고 한국에서 명사의 대접을 받으며 자유롭게 활동 하였다, 이 일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山)
■마이클 리 박사님으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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