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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 그늘 속에 가려진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을 수호하다 순절한 호남출신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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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가장 큰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역감정이 아닐까. 즉,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거나 그 지역 출신인 사람들에게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갖는 좋지 않은 생각이나 편견 말이다. 지역감정은 과거 정치인들이 만들어 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면서도 막상 선거운동을 할 때는 여전히 그것을 이용하려 든다. 

지역감정의 심화는 날이 갈수록 국민단합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국민적 화합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글로벌 시대다. 민족의 반목과 불화를 일으키는 지역감정은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들이 단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감정을 기필코 극복해야 한다. 

지역감정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는 유일한 해답은 역사에 있다. 지역감정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을 수호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호남출신 영웅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제대로 인식할 때만이 지역감정으로 인한 정체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임진왜란 때만해도 영남지역을 수호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자랑스러운 호남출신 훌륭한 영웅들이 있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나라가 어려움을 맞았을 때나 또 겨레가 난관에 빠졌을 때면 반드시 우리의 ‘용감한 호남출신의 영웅’들은 분연히 일어나 가장 선두에 서서 구국애족의 제단에서 피 흘려 싸웠던 것이다. 

이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던진 자랑스러운 호남인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부각시켜 지역감정을 타파하자는 차원에서 “지역감정의 그늘 속에 가려진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을 수호하다 순국한 호남출신 영웅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지금 우리사회의 지역감정은 도대체 어느 때부터 꼬였을까? 작금의 우리사회를 바라보면 임진왜란 때는 물론 한말 일제침략으로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영남지역은 물론 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순절한 호남출신 선조들의 희생과 슬픔을 새삼 떠올리며 대표적인 인물들의 업적을 본보 선데이저널이 재조명해보았다/(편집자 주)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1551~1592)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는 1551년(명종6)정월, 여산(礪山)송씨로 아버지 복흥은 황해도 송화현감을 지낸 전북 고부군 천곡태생으로 부친의 관직생활 중 서울 황화방(지금의 정동 덕수궁 길 근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송상현 동해부사의 세거지(조상대대로 살아온 땅)는 오늘날 전북 정읍시 능소동(당시에는 고부군)이며, 자신의 자를 천곡이라 정한 것도 바로 고향 천곡(泉谷)마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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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 권오창 화백이 그린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의 국가표준영정

송상현 동래부사 어머니는 안동김씨 이다. 송상현 동래부사의 고향은 전북 정읍시 능소동(마을 통·폐합 이전, 전북 정읍군 덕천면 천곡마을-전라북도지정문화재 230P 수록됨)으로,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로 1576년(선조9)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년부터 동래부사로 있었다.

잠시 당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송상현 동래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과 더불어 항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친에게 “달빛에 비추인 외로운 성은 줄지어 선 군진을 높은 베개로 삼았고, 군신의 의리가 무거움에 부자(父子)의 은혜는 오히려 가벼운 듯하구나(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라는 글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1610년(광해군2)부산 동래에 있던 묘소를 현재 위치하고 있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5번지로 이전하였다. 그런데 송상현 동래부사의 묘가 최후를 마친 부산 동래도 아니고 고향 정읍도 아닌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5번지에 묘소가 있는 사연은 돌아가신 후 선조임금의 특별지시로 당시 최고의 지관인 ‘두사총’에게 명당자리를 구하라고 해 그 이전까지 연고가 없었던 그곳에 현재의 묘소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송상현 동래부사 묘소 본전은 정면 3칸·옆면 1칸의 겹처마 팔작 목조기와집이고, 내부는 통칸 마루방으로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忠烈廟(충렬묘)’라고 현판한 소슬 삼문을 세우고 석축담장을 둘렀다. 충북도에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제향 하는 사당을 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홍문(紅門)을 세우고 3칸으로 구분된 계단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단(壇)을 구분하였다. 사당 아래 마을 입구에는 1595년(선조 28)에 세운 충신문(宋象賢忠臣旌閭門)이 있는데,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목조기와집이다. 사당 뒷산에는 묘소가 있고, 묘소 좌측 아래 진입로 변에 신도비가 있다. 또 종가에는 영조 때 변박계(卞璞繼)가 그린 ‘동래부사순절도’(보물 392호)와 천곡수필(泉谷手筆)등이 보관되고 있다.

1592년(선조25) 4월 13일(음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여명의 왜군은 700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국경을 침략하여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이튿날 동래읍성을 진격하였다.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인 취병장에 군사들을 집결시킨 왜적들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라는 글을 목패에 새겨 남문 밖에 세웠다. 

송상현 동래부사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목패에 “싸워서 죽는 건 쉽고, 길을 빌리는 건 어려울 게다”라고 써서 적의 진지에 던졌다. 그러자 왜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송상현 동래부사는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죽기로 싸웠다. 그러나 4월 15일(음) 중과부적으로 동래읍성의 성벽이 뚫리고, 양산군수 조영규, 조방장 홍충관, 동래교수 노개방 등과 일반군사와 백성들과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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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군수 조영규 정려각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송상현 동래부사는 갑옷 위에 조복을 받쳐 입고 우뚝 솟은 산과 같이 꼿꼿하게 호상에 앉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왜군의 장수 다이라 스키마스(平調益)는 과거부터 송상현 동래부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피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송상현 동래부사는 이에 응하지 않고 호상에서 내려와 북쪽의 국왕에게 예를 올린 다음 부친 송복흥에게 편지글과 시를 남겼다.

현재 부산시에서는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에는 충렬사와 송공단을 비롯하여 전국의 사우와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부산진구 양정동에는 송상현 동상과 송상현 광장, 충렬대로가 조성돼 부산의 상징적 인물로 꼽고 있다. 충렬사에서는 송상현 동래부사를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충신들을 기리는 제향을 매년 5월 25일(양) 올린다. 

부산은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를 부산의 상징적 인물로 꼽고 있다.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성 전투는 부산 정신, 나아가 조선의 저항정신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송상현 동래부사의 출신지역이 어디인지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충렬사는 물론 송상현 광장이나 동상에도 송상현 동래부사가 전북 정읍 출신이라는 사실이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가 취재를 하면서 ‘송상현 광장’ 이름을 최초로 작명했던 조성호 부산시 前행정자치국장 마저도 송상현 동래부사의 고향을 지금 묘소가 있는 청주쯤으로 기억할 정도이니, 일반시민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필자주변의 수많은 지인들을 대상으로 송상현 동래부사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질문을 해보았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필자의 학교 선배님이신 윤상수 선배 단 한 사람뿐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부산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는 부산시민들은 송상현 동래부사의 고향이 호남(전북 정읍)출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작 송상현 동래부사의 고향인 전북에서는 정충사라는 사당에 배향하는 정도로 소홀히 하는데 비해 오히려 부산과 충북에서는 송상현 동래부사에 대한 대대적인 숭모사업을 통해 충절의 고장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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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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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전황이 불리하자,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등 다른 벼슬아치들은 저 살기위해 줄행랑을 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전라도 출신의 송상현 동래부사와 조영규 양산군수는 부산 백성들을 지키다가 목숨을 버린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이 만든 지역감정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한다면, 이는 망국의 길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며, 순절한 영웅들에게 욕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의 수많은 백성들은 왜적의 침략에 견디지 못하고 전라도와 충청도지역 등지로 피난하고, 왜적을 물리쳤던 전라도출신 병사들이 영남지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역감정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소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양산군수 ‘조영규’(1535~1592)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양산군수 조영규의 본관은 직산(稷山), 사헌부 지평 조변의 5세손으로, 고조부는 무주현감 조소동이고, 증조부는 병절교위 조명눌이며, 조부는 오위부사과 조순거, 부친은 수의부위 조준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고, 아들은 조정로이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전남 장성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상과 완력이 뛰어났다. 1554년(명종9)스무 살 되던 해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며, 훈련참외에 임명되었다. 사복시주부, 판관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제주판관, 무주현감 등을 지냈다.

부친의 상을 당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을 마치고, 김제 만경, 전남 영암, 평북 용천, 전남 낙안, 경북 영해 등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양산군수로 있을 때 왜군이 부산을 침범하여 동래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동래부사 송상현을 만나서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양산에 있는 노모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다시 동래읍성으로 들어가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항전하다 순절하였다. 당시 조영규의 나이는 58세였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아들 조정로는 가묘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67년(현종8) 전남 장성의 사림이 조영규와 아들 조정로를 전남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서원에 배향하였고, 1669년(숙종22)경남 양산시 교동 양산충렬사에 배향되었다. 부산에서는 1709년(숙종35) 옛 송공단 터의 충렬사 별사에 위패를 모셨다가 1736년(영조12)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로 옮겼다.
    
전남 장성군의 정려각은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 전사한 조영규와 효자로 이름난 그의 아들 조정로를 표창하기 위해 현종 10년(1669)국가의 명령으로 건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려각 안에 걸려 있는 현판 "위산조씨충효정려중건기"에 의하면 헌종 15년(1849)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정려각 안에는 명정 표시의 두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충신 증가선대부호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 행통정대부 양산군수 조영규지려"라 되어 있고, 하나는 "효가 증선무랑 빙고별검 조정노지려"라 되어 있다. 

무신 조영규(1535 ~ 1592)는 중종 30년(1535)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장성 출신으로 명종 9년(1554)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현감, 전라도 낙안, 평안도 용천현감 등 8개 고을의 현감을 지냈으며, 재임 시 청렴결백한 목민관으로 유명하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 전사하였다.
 
그 후 호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현종 10년(1669) 충신으로 정려되었고, 그의 아들 효자처사 조정로(1559~1612)와 함께 현재의 위치에 정려각을 건립 봉향했다. 1667년 모암서원(현재는 소실되고 없음)에 봉향되었고, 1669년 임금의 명으로 양산의 충렬사에 봉향하고 있다.  

● 충장공 ‘정운’ 장군 (1542~1592)     

임진왜란 때 부산 영도에서 순절한 정운(鄭運)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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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사 정운 장군 영정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장군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지금 부산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 장군의 사망으로 이순신 장군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도이건 간에 정운 장군은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대목(상기와 동일한 대목)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 장군을 북병사로 추증하였고, 1604년에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 흥양(지금 고흥)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 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번지의 흥양 쌍충사(雙忠祠)에 이대원(李大源)장군과 함께 제향 되었다. 그리고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에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녹도만호 정운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1798년 정조 22년 정운 장군의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 시절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조판사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썼다. 비각은 1974년에 부산시에서 비각을 지었고, 1972년 6월 26일 지정되었다. 정운 관련 서적은 정충장공실기(鄭忠壯公實記)가 있다. 녹도만호 정운 장군의 실기로 2권 2책의 목판활자인쇄본이다. 

8대손 정희(鄭熺)가 1866년(고종3)에 편찬, 간행하였다. 2권에 수록된 명원소(鳴寃疏)는 정운 장군의 아들 정지언(鄭之彦)이 올린 상소로‚ 부친이 전장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은데도 녹훈의 대상에서 누락되었음을 원통히 여겨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저자미상의 변백사제장사론(辨白沙諸將士論)에서 영남이 위태로웠을 때 이순신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사람이 순천부사 권준과 광양현감 어영담이었다는 백사(白沙, 이항복)의 말을 반박하는 내용의 글이다. 이 글에서는 그 공은 녹도만호 정운 장군과 군관 송희립의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권준은 오히려 관곡을 빼돌리려 하다가 들킨 인물로 남의 공을 가로챘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운 장군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과에도 공신의 직위를 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다행히 임진년(1652년 효종3년)에 정운 장군이 배향된 충절사가 건립됐고, 숙종 7년인 1681년에 충절사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정조 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운 장군의 숭고한 순국정신을 기리는 '충신 정운공 순의비'가 부산 몰운대에 세워졌고, 부산시지정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특히 부산시는 정운 장군이 전사한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해 정운 장군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부산에서 이순신 장군과 버금가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정운 장군은 정작 고향인 전남에서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운 장군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해남 옥천면 대산마을에 사당인 '충절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운 장군의 사당 등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 보수와 함께 업적을 기리는 재조명작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호남 최초·최후 건재 ‘김천일’ 의병장(1537~1593)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 고시니 유키나카가 18,000 여명을 이끌고 부산으로 쳐들어온다.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대군은 부산과 동래를 이틀 만에 함락시키고 서울로 곧장 진격한다.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전쟁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전쟁을 하려니 군사 몇 백 명도 구하기 힘들었다.

신립 장군을 충청도에서 싸우도록 했지만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한다. 전쟁이 일어 난지 20일도 채 안되어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수군과 의병들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은 옥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을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 김덕령 등 호남의 의병장들이 일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왜군과 싸운다.

그래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이 회자 된다. 이 말은 1593년 7월 이순신 장군이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쓴 편지에 나온 말이다. 편지를 쓴 시기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거지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이다. 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인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라고 했을까? 이는 전라좌수사시절 자신을 도와준 호남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국가존망의 위기에 조선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인들 때문이었다, 라는 뜻으로 읽힌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가 보존되었기 때문이었고, 전라도 보존은 전라도 의병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전라도는 최대 의병 봉기지 이었다. 최대 의병봉기지 호남! 그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이가 나주출신 건재 김천일 의병장이다. 호남 최초의 의병장 김천일,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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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 의병장 영정

건재 김천일 의병장은 전남 나주에서 진사였던 언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 년도 안 되어 고아가 된다. 19세 때 일재 이향(1499~1576)의 문하가 되어 성리학과 무예를 닦는다. 37세 때인 선조6년(1573)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종6품)가 된 뒤, 용안,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 등을 역임한다. 53세 때인 선조22년(1589)수원부사 시절 수십 년간 탈세하던 부호들의 전답에 일반백성과 똑같이 세금을 부과하자, 권력층과 연계된 부호들의 무고로 탄핵받아 파직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나주 시골집에 있었던 이유다.   
   
그는 임금이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목 놓아 통곡한다. 그리고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 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피난하였는데,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라고 하면서 거병을 결심한다.

6월 3일 건재 김천일 의병장은 나주에서 300 의병을 모아 거병한 후 북상 길에 오른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었고, 최후의 의병장이었다. 6월 23일 수원에 도착한 후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금령전투 등에서 큰 성과를 올린다. 8월 강화도로 진을 옮긴 후에도 양화도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장례원판결사에 제수되고 참의사라는 군호를 받는다. 이듬해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성주를 거쳐 함안에 이른다. 이 때 명·왜 강화가 추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하한 왜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부근에 집결, 동래, 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2차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은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마저도 진주를 떠나고 만다. 그러나 김천일 의병장이 6월 14일 300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관군과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 호남출신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모여든다. 김천일 의병장은 3500 민관군의 주장인 도절제가 되어 10만에 가까운 왜적을 9일간이나 막아 낸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과 함께 촉성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그의 사후 선조 36년(1603)좌찬성에 추증되고 광해군 10년(1618)영의정에 기증된다. 전남 나주의 정렬사, 진주 창렬사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주 정렬사에는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쥔 채 갑옷도 투구도 없이 나선 김천일 의병장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아래에는 “56세의 선비로 붓을 버리고 쾌자(맨 소매 옷)만을 걸치고 투구 없는 맨 머리로 앞장서니 선생의 충국에 큰 뜻을 따르는 의사가 많았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목숨을 걸고 싸운 관료와 의병들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애국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지역감정의 그늘 속에 가려진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을 수호하다 순국한 호남출신 영웅들!”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망국병인 지역감정을 타파해야 할 때이다.

돌이켜 보면, 우선 한 두 가지 예로서 임진왜란 때만 해도 전라도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어찌하지도 못했을 것으로 믿는다. 당시 한산, 명량, 노량대첩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전라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예하 장병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이었다. 또 전라감사 권율 도원수의 행주대첩에 참여한 병사들도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이 따라가서 싸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출신 관료와 의병들이 저 멀리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 영남지역까지 나가서 얼마나 용감히 싸웠던가. 그리고 한말에는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분연히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들고 항일의병투쟁을 벌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을 던진 자랑스러운 호남인들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부각 시키는 차원에서 망국병인 지역감정을 이제는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김쌍주 주간  sunday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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