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집)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은인들 ☘ 목숨 걸고 '백범 김구' 선생을 도와준 추푸청 & 피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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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트] (3·1절 특집)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은인들
☘ 목숨 걸고 '백범 김구' 선생을 도와준 추푸청 & 피치 목사 | 톡파원 25시 | JTBC 250303 방송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H90ECDSgA9A
JTBC "톡파원 25시" (3·1절 특집) 하이라이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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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도운 사람들 (00:00)
- 일본 경찰이 김구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약 200억 원을 걸었음.
- 보성이 운영했던 종이 공장에서 피신 후, 양아들 진동의 집에서 거처를 마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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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과 우무간다 운동 (01:04 - 06:25)
- 르완다에서는 모든 주민이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동네 청소하는 '우무간다' 실시.
- 르완다 대학살(1994)로 약 100일 동안 100만 명 희생.
-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했으며, 후투족 강경파가 대통령을 암살해 내전이 심화됨.
- 대학살 이후, 투치족 지도자 폴 카가메가 대통령이 되어 종족 간 갈등 해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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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09:36 - 11:45)
- 3·1운동 이후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필요성을 강조하며 임시정부 설립 주장.
- 서울 한성 정부, 블라디보스토크 노령 정부, 상하이 임시정부가 존재했으나 결국 상하이로 통합됨.
-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하여 일본의 간섭을 피해 독립운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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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12:51 - 19:23)
-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장절 행사에서 폭탄 투척하여 일본군 고위 인사 사망.
- 김구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회중시계를 교환하며 "지하에서 만나세"라고 작별.
- 체포 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당함.
- 시신은 14년간 길가에 방치되었으며, 1946년 대한민국으로 송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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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가족과 희비가 교차한 상하이 생활 (20:29 - 21:34)
- 상하이에서 둘째 아들 김신 출생,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냄.
- 그러나 부인 최줄래 여사가 사고로 폐를 다쳐 사망, 큰 슬픔 겪음.
-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집필한 장소였으나, 현재 건물 일부만 남아 있음.
???? 2025년은 광복 80주년 및 3·1운동 106주년
-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며 독립운동 발자취를 영상으로 조명.
Transcript: 전문
(00:00) 일본 경찰들은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현재 가치로는 약 2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환상까지 걸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저 보성이 자기 아들이 운영을 하다 문 닫았던 종이 공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일단은 피신을 시키신 다음에 먹고자고 할수 있는 숙소가 필요하잖아요 그니까 자기 양아들이 있었어요 진동이라고 네가 지금 층 집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를 거처로 내줘라라고 해서 김구 선생님이 간 것이 바로 아까 보셨던 그 집이거든요 [음악] 야 언뜻 하와이 내지는 사이판 같다 약간 아 그런 느낌 여러분 제가 지금 걷고는이 거리는요 수도 가리에 있는 자동차 금지 구역 인부가 시티 인데요 되게 설다이 보시다시피 너무 깨끗해요 그리고 자꾸 이렇게 쓰레기들이 있거든요 깨끗하다 왜 이렇게 깨끗해 야 진금 뭐 하나 떨어진게 없다 아니
(01:04) 바닥 너무 깨끗한 거 봐 루다는 왜 이렇게 깨끗한가요 이거 궁금하시죠 월급이 엄청 센가 보다 그런가 봐 매달 마지막 토요일 모든 루완다 주민들이 자기 동네를 정사하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 뭐지 이거 그 날 이름이 우무 간다 이고요 우무 간다 우리나라 세마을 운동 같은 건 어 실제로 대통령이 그걸 모티브로 했잖아 맞아 맞아 우리나라 세마을 운동을 따라한다고 했었어요 아 그래 아 저 따라하 고예요 그니까 그 르완다 대통령이 우리나라 언론과 인터뷰라 제기 있어요 그니까 그 한국이 발전을 했으면은 루다도 발전할 수가 있다 해서 어 한국 롤모델로 삼고 있다고 얘기했어 했구나 음악이 딱이 노래 진짜 진짜 음악이 딱 야 너무 오랜만에도 일어나 어 누나 지금 따라는 거 아 난 한은 [음악] 알면서 모른척하지 마 나
(02:08) KTV 홍보 방송에서 아니 발로는 리듬 타 모고 [웃음] 뭐이 여러분 루다 눈부신 발전 에는요 약 30년 전에 가슴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유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러 가시죠 또 앞에 피가 오네요 여러분 제가 지금 도착한 곳은 르완다 대학살의 주년을 기념하여 오픈된 갈리 대학살 기념관입니다 갈리 제이 거의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제노사이드 거예요 일단은 시작은 독일에서 시작을 해요 르완다가 원래 독일 식민지였고
(03:12) 근데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 하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르완다가 이제 승전국 연합국의 이론이었던 이제 벨기에로 넘어가게 됩니다 아 그런 다음에 약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게 뭐냐면은 그 당시 제국주의가 뭘 했냐면 디바이드 룰이라고 해가지고 서로 이제 그 반목을 하게 만들었어요 다른 종주 길 어떻게 했냐 그 후투 족이 있고 투치 족이 있는데 조금 더 얼굴이 밝고 코가 높으면 투치족 그리고 약간 얼굴이 평평하고 코가 낮으면 후투족 아 얼굴 생김새로 그 우리를 치면 주민들에 그 종족이 표시가 돼 있어요 후적이 수예요 치적이 소수 종이었고 소수였던 적에게 권력을 준 거예요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소수인 투은 다수인 후을 강압 무단 통치하게 돼요 그래야지 기 자기가 사니까음 그러면 내가 후트 적이라고 하면은 악에 바치겠어이 상황 바뀌면 우리가 복수로 들어갈 것이다 해가지고 62년에 이제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하자마자 상황이 급변해 트 족들이
(04:18) 당한만큼 해 주겠다라고 하면서 복수전이 시작이 돼요 그러면서 다수인 후투족과 이제 소수인 투 적이 이제 내전을 버리는데 의외로 소수인 투수력이 잘 싸웠어요 어 또 쳤구나 이런 가운데 당시 이제 후투족 대통령이 잠깐 스톱 우리 같은 한나라 국민이었던 왜이 치고받고 싸우냐라고 해서 1993년에 잠깐 정전 협정을 맺어요 응 근데 1994년 4월 6일 날 후투족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를 당해요 아 공격을 당한 거네요 후투족 지도자들이 노골적으로 얘기해요 투치족 그이 우리 대통령을 죽였다음 투치족을 [웃음] 죽이자 아이고 아 어린애가 봐 생존자 지문에 따르면 그 어린 학생이었는데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친절했던 선생님이 바로 오늘 칼들고 너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고 남편과
(05:21) 아내가 다른 종족이면 남편이 부인도 죽이고 그요 무려 100일 동안에만 이상 이게 뭐야 어 저게 뭐야 다 다 사람이야데 후투 족이 죽였을 수도 있겠다 그죠 와 진짜 예리하다 나중에 그 조사 결과에 따르면 후투 중의 강경파가 죽인 거예요 아 중 졌 졌어 밝혀졌어 우리가 왜 투투가 치와 평화 협정을 맺고 평화 협정을 맺은 대통령 우리 저은 내부에 있는 거야 됐다 우리 대통령이 자기에 없다해서 같은 종족이 죽인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죄도 없이 안에 가서 보려고 하는데 문제점이 뭐냐면 안에서 자룡이 금지입니다 제가 혼자서 갈라 먹도록 하겠습니다 자료면 써야지 [음악] 우리가 아 표정이 너무 안 좋네 자 여러분 혼자서 이제 관람하고
(06:25) 왔는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의 기분이 너무 이상해지고 아 진짜 인생 처 이렇게 학살 기념관은 다닌 거 아니거든요 다른 나라들에서 갔었는데 여기서 좀 끔찍했던 거 뭐냐면 여기 있는 해골들은 특히 머리 와 개조 있었어 여러분 다 부서지고 아 저 꽂혀 있는 거예요 그런 거 같아요 흉기가 어 진짜 좋은 거지 두 번 다이 인간이 같은 인간한테 이한 짓을 하지 않 좋습니다 그때 지금도 떻게 던게 UN 원래 거기서 이제 평화 대가 있었는데 다 빠져나왔어 철수하고 너 위험해서 그니까 위험하다 보다는 반 잘못됐다 아 그래서 사실은 이제 프랑스 벨기에 그거에 대한 책임 너무 크기 때문에 당연히 부족하지만 사과를 사과하기도 했고 인정을 했지만 제가 봤을 때 아직은 좀 더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진짜
(07:29) [음악] 여러분 공원으로 오시면 학사 시기에 목숨을 잃었던 무고한 로한다 시민들의 이름들이 이렇게 에다가 적혀 있습니다 진짜 무고한 시민들이다 여기에다가 25만 명이 묻혔습니다 여러분 관이 그대로 있네요 그면이 갈이 어떻게 봉합 일 다 내전은 그 게도 족이 이끄는 르완다 애국 전선이 승리를 거둬요이 소수 투치족의 폴 카가메 인물이 르완다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해요 지금 와 여기에 후트 족은 멘붕이 와요 우리 진짜 죽었다 했는데이 폴 카가메 투치족의 지도자가 모두 총 다 내려놔라 이제부터는 종족 갈등 없다 오 최종 책임자들은 엄버 처한다 순수하게 따랐던 사람들은 관용으로 다 용서하겠다 [음악] 얼마나 끔찍한 일이 여기서
(08:33) 벌어졌는지 감이 [음악] 오더라고요 자 2025년 광복 80주년이 삼일운동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모두가 있는다 해도 우리는 선조들의 목숨건 독립 운동만큼은 결코 잊어서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봤는데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좋 운동을 떠올리면 국내에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만 해외 역시 국내 못지 않게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펼쳤는데요 특히 중국에서 많이 했죠죠 지난번에 하와이에서도 하이한 맞아요 우리 갔었죠 특히 그중에서도 이곳 상하이는 해외 독립운동의 점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것으로 아주의 입니다 상회 임시 정부 있었습니다 예 그죠 상하이 같은 경우에는 왜 독립운동이 요충지가 됐냐면 이제 1919년 3월 1일 날
(09:36) 3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실패한 운동이었어요 독립을 못 했으니까 그때 신채호 선생님이라고 이제 독립운동 가고 계시는데 무슨 말이냐면 열기를 모을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이 있었다면은이 열기를 가지고 독립할 수 있었는데 구심점이 없었던 거 정말 통탄스럽다 했어요 그래서 정부를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움직임이 나와요 그래서 여러 이제 임시 정부가 만들어지는데 대표적으로 그 당시 이제 서울 한성에 있었던 한성 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 정부라게 또 만들어져요음 그다음에 상해 이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데 서울에 있던 한성 정부 같은 경우에는 식민지 조선 한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약이 있어요 활동해요 그렇네 그런다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노령 정부 같은 경우에는 한반도가 너무 가깝다 보니까 일본의 진압이 너무 용이해요음 그러면 상하이가 이제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는데 이제 상하이가 이제 떠올랐던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아편전쟁 이후에 이제 상하이가 강제 개항을 당해요 영국에 의해서 아이고 중국도 자존심이 있었는지 화양
(10:39) 별거라고 해가지고 중국인과 화양 서양인들은 별거 같이 있을 수가 없다 해서 조계지를 만들어 줘요 영국 프랑스는 각자 너희들 영국 타운 프랑스 타운 안에 들어가서 거기만서만 살아라 근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게 나름대로 치외 법권 지역이 돼버린 거예요 프랑스 타원 영국 타원 이런 식으로 상의 임시정부를 이제 그 추진했던 사람들은 조계지에 들어가서 우리가 그럼 임시정부를 만들자 어디로 갈까 일본과 별 관계가 없는 프랑스 조계지에 들어가 가지고 임시정부를 만들 상 그래서 지금도 있는 그 임시정부 청사가 옛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어요음 그래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각 흩어졌던 모든 임시 정부들이 통화됩니다 금 사는데 상황이 여행 많이 가던데 상이 진짜 많이 가요 예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을 루신 공원입니다 아 루신 공원 상하이에 오신 한국인들이 꼭 방문해야 하는 장소로도 꼽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지 안으로 들어가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그냥 봤을 때
(11:45) 그냥 뭐 일반고 루신 공원는 1896년 오락장으로 조성된 공간으로 영국의 한 원예가가 설계한 곳이라 이렇게 서양식 정원 양식을 볼 수 있는데요 현재는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시의 길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여 루신 공원이 되었습니다 루신 생가가 바로 옆에 있고 신의 묘가 저 안에 있어요 아 안에 있어요 얼핏보기엔 아주 평화롭고 평범한 공원인데요 과연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1932년 4월 29일 루신 공원에서는 령의 생일과 일본의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이어졌고이를 위해 약 만 명의 인파가 모였는데요 어이구야 그러던 오전 11시 50분 갑자기 폭탄이 나라와 터지면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폭탄의 여파로 일본군 육군
(12:51) 대장 시라카와 요시 놀이를 포함해 고위급 인사 두 명이 사망하고 네명의 주의 인사와 일본군 병사들은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요 주 상하의 그 총사 그 시과 요신 오리가 결국엔 죽어요 사가 돼가지고 피 묻든 그 군복 있잖아요 피든 군복이 지금도 야스 신사에 전시가 돼 있어요 그래요 그렇다면이 폭탄을 던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다들 누군지 아시겠죠 바로 윤봉길 의사입니다 당시 이곳의 이름은 홍공 였는데요 아 홍콩 저 동네 이름이에요 홍콩 홍 제가 지금서 있는이 광장은 당시 윤봉기 의사가 폭발을 던진 현장으로 추정되는 [음악] 곳입니다음 홍구공원 의거 여기 한국어 보이시나요 루신
(13:56) 공원에는 윤봉길 사의 길이고 그의 거 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윤봉길 기념관이 있는데요 어 한글로 딱 써 있네 그렇다면 윤봉길 이사는 어떻게 의거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1930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던 상하이에 도착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공부하고 심지어 때로는 야채 장수를 하면서 정보를 얻는 등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음 그때 윤봉기 리사가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김구 선생이었고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이 안 일어났잖아 그 점점점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임시정 그러던 와중에 1931년 9월 달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면서 만주를 침공해 들어가요 그니까 그나마 있던 중국 국민 당군이 중국 대륙에서 만주 쪽으로 올라가요 그 그래서 우리 독립
(15:00) 세력에게 지원해 중국군의 지원도 끊겨요 그니까면 초과에 빠진 거예요 중국 내에 있었던 우리 독립 세력이음 그때 이제 그 상회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김구 선생님이 결단 내립니다 뭔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극약 처방을 내리자 반인 애국단이라 걸 만들어 가지고 일본의 요인들 몇몇을 암살시도 찾아와요 어 첫 번째가 이봉창 의사였던 이봉창 의사의 그 도쿄 폭탄투척 사건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뭐냐면 1932년 4월 29일 날 상해에서 일본 왕 생일 파티를 상해 한복판에서 일본이 하겠다고 해요 이거를 당시에 상해 몰래 들어와 있던 청년 윤봉길의사가 보고 저날이 거사 날이다 그렇지 해서 김구선생을 살아갑니다음 그날 제가 제 목숨 바치고 제가 거사 하겠습니다 아 정말 대단하시다 그런 다음에 이제 그
(16:06) 거사 날인 4월 29일 날 그때 여기가 지금 천장절 행사 때는 일본인 밖에 못 들어갔어요 그래서 윤봉기 의사도 일본인으로 위장을 해야 되는데 이런 이상한 옷을 입고 갈 수 없잖아요 비싼 양복을 사 있고 그다음에 비싼 회중시계를 산 거예요음 아 마지막으로 작별의 사 하기 전에 딱 보니까 김부 선생님은 싸구려 회중 식을 차고 계십니다 제가이 산 회중 시계는 6억원짜리 비싼 시계인데 지금 보니까 선생님은 2원짜리 싼 시계네요 어차피 저한테 지금 허락한 시간은 한시간 밖에 없습니다 바 바꾸죠 그래서 눈물을 먹은 거 두 사람이 바꿔요 아버지가 아들 벌인데 사지로 모는 거잖아요 그때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에 손을 잡고 김구 선생님이 이런 말 했다 거죠 우리 지하에서 만나세 아 그러면서이 거사가 이루어진 거죠음 그럼 이제는 이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내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나오네 이곳에는 거와 관련된 물품들이
(17:12)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윤봉기 의사면 도시락형 폭탄을 생각하실 텐데 사실 도시락형 폭탄 사지 않다고 [음악] 합니다는 가 가지고 있던 두가지 폭탄을 모형으로 전시해 두었는데요 동 거사 아침 일본인처럼 양복을 입고 수통을 깨에 걸어 매고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들고 경찰들의 의심을 피해 무사히 내부로 진입했는데 어 윤봉길 이사는 군중속으로 들어가서 행사를 지켜보다 일본국가 합창이 끝 때쯤 게 매고 있던 수통의 폭탄을 단상 위에 두척을 해 의거에 성공합니다 더 실하게 안 터졌나 윤봉길 리사는 체포된 후 상황을 보니 도저히 두 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는데 수통 폭탄에 끈이
(18:17)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해 수통 폭탄을 던졌다고 진술했는데요 아 당시 도시락 모양의 폭탄이 인상 기뻐서 윤봉길 이사하면 도시락 폭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어 보셔야 돼요 저 나무 기둥 있잖아요네 네네 당당하게 저 묶여 있는 저 사진 아 여기는 윤봉길의사의 처형 당시 사용된 형틀의 모양과 처형 모습이 찍힌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 이거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기 의사는 혹독하게 신문을 당했는데요 5월 하이에 있는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오사카 형무소에서 감되 수감되었다가 그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선곡하였습니다 여기서 좀 가슴 아픈 얘기가 뭐냐면은 아 어디 묻었냐 그 공도 묘지가 있는데 공동묘지 옆에 스리 기장 옆에
(19:23) 거기서 그냥 길가에가로수 그래가 46년 3월달에 처음으로 발 대한민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14년 정도 걸렸는데 그 14년 동안 사람들이 거기 계속 밟고 지나갔던 그런 길에 묻혀 있었던 거죠네 지금 올해는 광복 이제 80주년이 그 자리에 이제 윤봉기 주관 또 세울 예정이라고 [음악] 합니다음 상에서 독립운동을기할 때 빠질 수 없는게 바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인데 그중에서도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이었던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터가 있는 거 그 저건물 2층에서 이제 김구 선생님께서 이제 백범일지를 쓰셨어요 아 김구 일가가 살던 곳은 영경방 포라고 하는데요 영경방 10포이 집은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20:29) 현재는 이렇게 연방이 석만 남아 있고 아쉽게도 포에 대한 표식 볼 수 없습니다 없구나 사실 이곳은 김구 선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슬픈 순간을 모두 맞이한 곳인데요 이곳은 둘째 아들 김신이 태어난 곳으로 김구 선생은 어머니 광원여 아내 줄래 그리고 아들과지며 행복한 을보기 습니다 어 백범이 씨를 보면 역서 굉장히 행복하셨 거 같아요 정말 오랜만에 재밌는 가정을 이루었다라고 글을 쓰셨는데 안타까운게 뭐냐면 1924년에 김구 선생님의 부인인 그 최 줄레 여사가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떼굴떼굴 부르셔 가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패를 찔러 걸고 아 그래가지고 그 급히 병원으로 이제 폐 전문 병원으로 이송을 해야 되는데 당시 상해에서 패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 딱 한 군데밖에 없었어요 홍콩공원 옆에네 조지 안에 아 지금 사경을 해는 아내만 그쪽 병원으로
(21:34) 보내고 김구 선생님은 못 따라가요 그쪽으로 들어가면 잡힐 수 그래서 정정화 선생님이라고 해서 그 당시 이제 임시정부의 그 살림을 도마 하시던 그 여사 분이 계시는데 김고 선생님 대신 따라가요 따라 최질 레사와 함께 병원요 그니까 오늘내일 오늘내일 하시다가 임종 직전에까지 와요 아유 그 정정화 여사께서 얘기를 합니다 지금 곧 임종이 다가온 거 같 까 지금 김구 선생님 모시고겠다 절대 데려오지 말라고 데면 잡힌다고 생각해 봐요 지금 가면 우리가 볼 수 있거든요 영경방 그 병원까지 한 10km 밖에 안 돼요 차로 금방 이거든요 내가 남편이고 지금 부인은 저 앞에 10km 앞에서 지금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못 가잖아 지금요 그니까 할 수가 없죠 못 가잖아 그래서 부인의 인정을 못 봐요 정말 가슴 아픈 것입니다음 혹시 여러분 집에 현상금 약 200억 원이 걸린 외국인 친구가 살고 있다면
(22:40) 신고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 여기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김구 선생과 청이라는 중국인 사회 활동가인 당시 일본 경찰들은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현재 가치로는 약 200억 원에 달하는 거 현상까지 걸게 [음악] 됩니다 저렇게까지 많이 걸었어요 왜냐면 일본금 사령관을 죽였잖아 그이 계속 올라가구 당시 김구 선생의 체포를 위해 한국인 일정들까지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고 해요 얼마나 안했을까 진짜 매일 하지만 중국인 청의 일가는 김구 선생을 끝까지 지켜줬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을 있었 추청 역시 항일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위한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음 너무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김구 선생이 머물 집까지 제공해
(23:44) 줬다고 하는데요 이곳이 바로 주창이 마련한 김구 선생의 피난처입니다 피난처 야 정말 고마운 사람이네요 상해 입부 청사랑 항정우 입부 청사랑 많이 가시는데 저기는 많이 안 가세요 저기도 가봤어요 아 그래요 그럼 안으로 한번 들어가 [음악] 볼게요 여기서는 이렇게 김구 선생과 임시 정보에 대한 스토리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는 당시 김구 선생의 피난 경로가 표시되어 있어요 어 피난 노선도는 나와 있네요 예 여기 김구 선생이 상하 탈출을 도은 고마운 분이 계시는데요 바로 조지 애시모어 피치 목사 입니다 아 당시 일본 경찰들은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출구나 이제 미국인 선교사 피치는 경찰의 추격을 받던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의 저택에 숨겨 주는데요 이후 일본의 포위망이
(24:48) 좁혀지자 피치의 아내와 김구 선생은 부부로 위장하여 피치가 직 운전하는를 타고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에 현상금이 걸려 있는데 김구 선생님은 항까지 못 가십니다 가면 걸리니까 그래가지고 항이 조금 떨어져 있는 자신 가의 임시 은신처를 마련하신 건데 아까도 말씀드린 같이 홍 의거 이후에 중국 정부의 인식이 달라져요 와 4억의 중국인들이 못한 거를 한국의 한 청년이 했다라고 인식이 바뀌거든요이 저보성 이제 그 가의 지역 유지경 국민당 였거든요 당 국민당의 장석이 명령을 내립니다 지금 김부선과 생의 일행이 피신을 하고 있는데 가의 유지인 저보성 김구와 일행을 보호하라 명을내는 그래가지고 저보성이 자기 아들이 운영을 하다 문 닫았던 종이 공장이 있거든요 거기에 일단은 피신을 시키신 다음에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숙소가 필요하잖아요 그니까 자기 양아들이 있었어요 진동이라고 네가 지금 미친 집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를 거처로
(25:51) 내줘라라고 해서 김구 선생님이 간 것이 바로 아까 보셨던 그 집이거든요 김구 선생을 제일 먼저 장진구 진이라는 이름으로 광 상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으로 [음악] 피신했습니다 1933년 여름 김구 선생은 외출을 하다 광민이 아닌 것이 알려 붙잡히고 는데요 당시 양아들의 보증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진짜너무 많이 도와주셨네요 굉장히 감사하다고 느끼는게 뭐냐면 자기 며느리한테 얘기해요 며느리한테 김구 선생님을 모시고네 친정 집에 가서 좀 있다가 와라 그래서 중국인 저보성 선생님은 자기 일가족을 다 동원해 가지고 김부 선생님을 2년간 보고해 주셨거든요 대단하 진짜 벌리면 큰일 났는데 죽 본인도 목성을 하는 거잖아요 김구 선생님이 이런 글을 나오겠어요 백번 일지에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면 우리 동포와 가족들은
(26:55) 정말 고마워해야 될 가족이다음 여정을 활동 사진 동영상을 촬영하고 싶은데 이게 없기 때문에 내가 백범일지 글로 남긴다라고 남기어 그래서 김구 선생님의 일가족을 2년 동안 지켜준 저보 선생님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런 공로 덕분에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음 그래 맞아 아 정말 고마운 분이 그럼 너무 감사하지네 [음악] 거주지 관람 공간으로 [음악] 이동해보겠습니다음 여기요 맞아 중정에서 뒤쪽으로 가면 당시 사용했던 응접실이 있고요 당시 김구 선생이 실제로 머물렀던 2층으로 가볼게요이 방은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침실입니다
(27:58) 와 그대로 간직을 하고 있는 거네요 혹시이 방에서 특이한 부분을 눈치챈 분이 계실까요 저거 뒤에 창문인 보다 그 비상 탈출에는 망을 필수로 봐야 하잖아요음 잘 보여 어 이렇게 아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창문들 곳곳에 있습니다 아 [음악] 양쪽으로 신하 좋게 아 그지 구멍은 좁게 내가 봤 때는 넓게 보이게 넓게 밖에도 보이고 집 안쪽도 보이게끔 나 봤어 저기 라인가 있잖아 아 이거 이렇게 바닥 한쪽에 아주 작은 손잡이가 하나 있습니다음 구멍이 나 있죠 그 작은 손잡이를 들어올리면 절로 내려가면 1층으로 가서
(29:02) 배로 바로 호수로 나가어 저기를 그 유병제 씨하고 저하고 어떤 식으로 도망갔을를 그거고 동선을 그때로 [음악] 해봤어요음 계단은 없고 계단 사다리 해가고 사다 아 아 옆에 사다리가 있네 되게 좁다 근데 좁아요 근데 내가 봤을 때 급할 때는 그냥 뛰어내렸어 그 뛰어야지 잡고 뛰어내 내 시간 높겠다 그것도 안 걸리게 해야 되니까 그 쉽지 않죠 1층으로 내려오면 강에 배가 놓여 있는데요 아 동선이 렇게 돼 있어 집이 이렇게 호수와 맞닿아 있어서 배로 피난 다니기 아주 적합한 곳이었습니다요 배가 그대로 이렇게 재현돼 있어요 우와 아 일단은 그 2층에 있다가 창문을 열고 밀정이 온다는 것 낌새가 보면은 일층으로 뛰어 내려간 다음에 배를 타고 피신을 해요 나무 안쪽으로음 그래서 나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계속 이제 그 방황을 하시다가 다시 돌아가야 될 거
(30:05) 아니에요 사인을 맞추었어요 빨간색 옷을 걸어 놓으면은 안전하니까 돌아와라 검정색 옷을 걸어놓으면 위험하니까 오지 마라 그니까 검정색 옷이 걸려 있는 날은 계속 밤새도 그 나무에서 배위에 떠 돌아다니면서 생활하실거든요 심지어는 황정 우에서 임시정부 요원들이 김구 선생님 만나를 가에 오셨겠죠 집에서 못 만나요 음 임시정부 요인들도 배를 타고 남호 호수 위에서 선상 공무 회의를 하거든요음 저기가 보면은 너무 저 호수가 아름다워서 화가 나 아 저게 그냥 이렇게 숨어 계셨던 거잖아 저 아름다운데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 되게 이쁘구나 진짜 되게 이뻐 저기 되게 이뻐요 이쁘구나 호수도 굉장히 넓고 이거봐 저녁 석양 즈에 가면 너무 아름다워 역설적으로 진짜 아이런 하 에서 생활하던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후에도 지역을 이동하며 약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난 생활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31:08) 한 순간도 마음을 놀 수가 없잖아 잠도 잘못 자고 밀정 있고 죽음을 불사하는 험란한 여정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마침내 1945년 독립을 맞이했는데요 [박수] 오늘 만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 아주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아 너무 [음악] 좋았어요 오늘 저와 함께 일절을 맞아 독립의 발자취를 따라 돌아봤는데 어떠셨나요 여기는데 진짜 관광객이 없어요 여기 많이 갔으면 좋겠는데 다음에 꼭 한번 가봐야 되겠다 m